1. 가끔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마땅히 꺼내 먹을 만한 게 없는 날이 있다, 반찬통은 텅 비고 김치마저 시들시들해 보이면 괜히 허탈해지고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한숨이 나온다, 그런 날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계란판으로 향한다, 계란만 있으면 최소한 밥 한 끼는 버틸 수 있다는 묘한 안도감이 생기곤 한다.

2. 계란은 참 기특한 재료다, 부침으로도, 국에 넣어도, 간단히 삶아도 훌륭한데 그중에서도 계란말이는 가장 만만하면서도 든든하다, 밥상에 올라가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허전하지 않고 뭔가 제대로 차린 듯한 기분을 준다, 그래서 나는 반찬이 똑 떨어진 날이면 늘 습관처럼 계란말이를 먼저 떠올린다.
3. 후라이팬을 꺼내고 달걀을 깨뜨려 그릇에 넣으면 노란빛이 번져 나오는 순간부터 마음이 조금 풀린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소금 한 꼬집, 가끔은 파 한 줌, 혹은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당근 조각이라도 썰어 넣으면 색감도 맛도 훨씬 좋아진다, 그렇게 간단한 손질만으로도 한 끼를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대견하게 느껴진다.
4. 기름 두른 팬이 달아오르면 계란물을 부어 살짝 익히고 조심스럽게 접어 나가기 시작한다, 맨 처음 뒤집을 때는 늘 긴장이 된다, 실패하면 스크램블이 될 수도 있지만 몇 번만 천천히 굴리다 보면 어느새 가지런한 계란말이가 팬 위에 자리를 잡는다,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향이 공허했던 부엌을 금세 채워준다.
5.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겨 담을 때는 왠지 모르게 의식처럼 칼로 단면을 잘라 본다, 노란 속살이 가지런히 드러나면 혼자서도 흐뭇한 웃음이 지어진다, 반찬은 이것 하나뿐이지만 밥 한 공기와 함께라면 충분하다, 오히려 다른 게 많을 때보다 집중해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만족스러울 때도 있다.
6. 계란말이를 먹다 보면 어릴 적 도시락 생각이 떠오른다, 소풍날 엄마가 싸주던 네모 반듯한 계란말이는 늘 인기였다, 친구들과 돌려 먹으며 그 작은 조각 하나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는데, 이렇게 혼자 밥상에 올려두고 먹는 계란말이도 결국은 비슷한 위로를 준다, 단순하지만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든든하다.
7. 식사를 마친 뒤 싱크대에 놓인 빈 접시를 바라보면 이상하게도 뿌듯하다, 거창한 재료도, 손이 많이 가는 반찬도 아니었지만 배도 마음도 충분히 채워졌다는 기분이 든다, 오늘 하루를 허무하게 흘려보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냈다는 자잘한 성취감도 뒤따른다, 그렇게 계란말이는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남긴다.
8. 돌이켜보면 반찬 없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건 늘 계란말이었다, 지쳐서 장보러 나갈 힘이 없을 때도, 냉장고가 텅 비어 마음까지 허전할 때도, 계란 몇 개와 젓가락 몇 번의 휘젓기로 완성되는 이 작은 요리는 나를 여러 번 구해줬다, 그래서 계란말이를 먹는 날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하루를 버틸 힘을 얻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9.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화려하고 거창한 날들보다 소박하게 버텨낸 순간들이 결국은 가장 오래 남는 법이니까, 오늘도 나는 계란말이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 반찬 하나 없는 빈 밥상 위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그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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